한태경에게서 연락이 없다.
한태경답지 않게 어제 약한 소리를 조금 해서 걱정이 되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준비 때문에 바쁜가보다 싶어 문자로 ‘잘 다녀와. 전화하고.’ 라고 문자를 보냈다. 보통 문자를 보내면 바로 확인하는 사람이 확인도 하지 않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 아닌가.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아니, 애초에 정부다. 그들이 바퀴벌레와 같진 않은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이건은 집안에서 왔다 갔다 하다가 답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밖을 나갔다. 집 근처를 산책하다가 보이는 작은 카페에 앉아서 다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우스웠다. 한태경 걱정을 왜 하는 걸까. 자기보다 훨씬 잘난 놈이고 싸움도 잘하는 놈이니 무슨 일이 있으면 스스로 다 이겨내고 싸움에 승리할 녀석이었다. 그 독한 바퀴벌레들도 이기지 않았던가.
『태경 형 이제 각인된 사람도 없고, 약혼한 오메가도 없으니까요. 가만 놔두겠어요? 정부 차원에서 좋은 오메가 붙여 주려고 난리에요. 뭣하면 태경 형은 일부다처제 해도 된다고 말을 하겠어요.』
『그 말은 정부도 바퀴벌레들과 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데.』
『다를 바 없죠. 아마 태경 형은 당분간 힘들 거예요. 마음에 드는 오메가가 생겨서 당장 결혼하지 않는 이상, 계속 들들 볶을 걸요. 아버지들이 방어선을 쳐주고 있는데. 그래도… 한계가 있죠.』
재우와 했던 대화들이 떠올랐다. 그로 인해 알게 된 사실은 정부 역시 바퀴벌레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 그리고 더 뿌리치기 까다롭다는 거. 바퀴벌레들은 범법자들이지만, 정부는 법의 보호를 받으면서 한태경을 압박할 것이 뻔했다. 그리고 그들은 훨씬 권위 있고, 한태경을 압박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 그 한태경의 아버지들도 방어선을 쳐주고 있는데 한계가 있다고 하는 거겠지. 그렇다는 건 자신 역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이건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재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와! 이건 형이 웬일로 저에게 전화를??]
“일하는 중이지? 미안해.”
[아니에요. 좀 쉬고 있었어요. 산책 중입니다.]
혹여나 이건이 불편해할까 봐 이렇게 말해주는 재우의 사소한 배려가 너무 고맙다.
[형?]
“아, 혹시 태경이에게 연락이 있나 싶어서. 오전에 국회로 들어간 것으로 아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
[아, 저도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어요. 김 사범님이 같이 들어갔으니까 별일은 없을 거예요.]
“그렇겠지? 이게 바로 PTSD인가 보다. 뭔가 사소한 일도 불안감을 느끼네.”
[형, 괜찮으면 상담심리라도 받을래요? 우리 가족 담당의가 있어요.]
“아니야.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그냥 한태경이 눈앞에 있거나 옆에 있으면 괜찮아져. 그 말을 하려다가 이건은 입을 다물었다.
“그럼 태경이 연락 오면 나한테 연락 좀 해달라고 해줘.”
[나에게 전화할 시간에 형에게 먼저 할 걸요? 형이야말로 나중에 태경 형 연락받으면 저한테 연락 좀 해달라고 해주세요.]
“하하, 알았어.”
조금 무겁게 전화를 시작해 유쾌하고 끝내고 이건은 얼음이 다 녹아 버린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셨다. 이러고 있지 말자. 불안한 생각만 드니까. 병원 가서 재활이나 하자. 이건은 빈 커피잔은 반납하고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재활을 다 하고, 진 사범님의 체육관에 가서 아이들과 놀아주고, 해가 지고,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한태경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남긴 문자는 보지도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재우에게도 연락이 없는 거 보니 아무래도 그도 소식을 모르는 것 같고, 그렇다고 닦달하며 물어볼 수도 없고.
집으로 걸어가면서 휴대폰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도대체 누구에게 연락을 해봐야 하지.
『김 사범님이 같이 들어갔으니까 별일은 없을 거예요.』
아! 아까 재우가 했던 말이 떠올라 이건은 얼른 김 사범님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김 사범님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럼 김 사범님과 함께 움직일만한 경호원들은 뭔가 알지 않을까 해서 그들에게 쭉 연락을 돌렸다. 그러나 그들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점점 불안이 싹 트기 시작했다. 밤 10시, 11시까지 기다려 보고 연락 없으면 한태경 아버지들에게라도 전화를 해보자 결심하고 집에 딱 들어왔을 때 잠잠하던 휴대폰의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는 한태경이었다. 이건은 신발 벗는 것도 잊어버리고 얼른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 보세요?”
사실 전화 받자마자 너 어딘데 온종일 연락이 안 되냐고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이 한 가득이었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아 침착한 척, 아무런 일도 없었던 척 걱정하지 않은 척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수화기 너머에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한태경?”
혹시나 해서 발신자를 보았다. 한태경이 맞다. 뭐지?
“여보세요? 한태경. 야! 한태경! 왜 말이 없어?!”
[…이건….]
간신히 들은 한태경의 목소리에 안도할 수가 없었다. 완전히 갈라진 목소리. 그리고 힘든 숨소리가 지금 그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한태경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이건은 다시 집 밖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어디야?”
서이건 스스로 생각해도 무서울 정도로 낮은 목소리였다. 지금 당장 눈앞에 바퀴벌레가 있다면 찢어 밟아 죽였을 만큼.
“한태경, 어디야??”
[서… 이건….]
“그래, 시발 내 이름 서이건인 거 세상 사람들이 다 아니까 그만 말하고 어딘데??”
한태경은 정말 간신히 호텔 이름과 호실 이름만 말하고 전화가 끊겼다. 이건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어떻게 된 거지? 술을 마신 건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그는 한 번도 인사불성이 될 때까지 술을 마시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가 강제로 먹였거나 아니면 다른 일로 인하여 상태가 안 좋다는 건데 대체 누가?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그나마 의식을 차려서 자신에게 전화해서 다행인가. 이 사실을 김 사범님은 알고 있나? 이건은 다시 김 사범님과 주위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전부 전화기가 꺼져있다.
“미치겠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제발 무사해라 한태경. 제발.
◆
알파는 약한 생물을 보면 보호하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족속이다.
그리고… 서이건은 알파다.
◆
호텔에 도착했다. 가장 꼭대기 층인 로열층에 올라가려면 신분 확인이 필요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재우에게 연락했고, 재우는 놀라 호텔 인맥을 동원하여 이건을 로열층에 올려다 주었다. 다른 사람들을 붙여 줄 테니 그 사람들과 같이 올라가라고 재우가 이야기했지만 이대로 마냥 누군가가 오기를 기다릴 순 없었다.
“윽!”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느껴지는 한태경의 페로몬에 이건은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다. 뒤따라온 사람들이 힘들어하기에 얼른 엘리베이터를 아래로 내려보내고 자신은 페로몬이 느껴지는 쪽으로 조심히 걸어 들어갔다.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난장판이 된 현장을 볼 수 있었다. 싸움의 흔적도 보였고, 술병이 깨져 있는 것도 보였지만 다행히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한태경.”
이건은 한태경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하지만 침실에도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다행인지 아닌지 지금 이 안에는 한태경만 존재하는 것 같았다. 하긴 보통 인간이라면 이 페로몬을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자신도 괴롭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익숙해진 덕분인지 아니면 페로몬이 자신을 이끌어서 그런 건지 몰라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한태경에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페로몬의 압박이 점점 느슨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걷다가 발끝에 뭔가가 툭 채였다. 놀라 그것을 바라보니 주사기였다. 한 개가 아니라 몇 개가 너부러져 있는 것을 보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한태경!!”
페로몬이 느껴지는 쪽으로 조심히 걷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리고 한태경을 발견한 것은 스위트룸에 있는 작은 욕실에서였다. 그가 물이 없는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얼굴에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가엽고 불쌍하게 자신의 몸을 스스로 꼭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그저 안타깝고 불쌍해 보여서 이건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태경아.”
이건은 태경에게 다가갔다. 욕조 옆에 앉아 한태경의 뺨에 손을 대었다. 차갑다. 하지만 다행히 연한 숨의 기운은 느껴졌다.
“태경아.”
조심스럽게 이름을 한 번 더 불렀다. 그러자 한태경의 손이 올라와 이건의 손을 잡고 뺨을 비볐다.
“왔… 어…?”
반가운 듯 배시시 웃는 한태경의 모습은 무척 지쳐 보였다.
“왜… 이러고 있어.”
“힘드네… 이건아. 사는 게 힘들다. 지긋지긋해.”
그 한마디가 얼마나 무거운지 이건은 울컥해서 얼른 한태경을 끌어안았다.
“태경아. 나랑 같이 외국에 하지 않을래? 나랑 같이 각국을 여행하면서 너나 나나 그렇게 좋아하던 태권도나 가르치자.”
“같이… 도망가자고?”
“그래, 뭐 우리 둘이 같이 있는데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냐. 그래도 지금 이 삶보다 편하지 않을까.”
“…그래, 그것도 좋겠네.”
한태경은 이건을 끌어안았다.
“날 데려가 줘. 이건아. 더는 이곳에 있는 것이 싫다.”
곧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지며 재우와 경호원들이 들어왔다. 재우는 욕실에서 끌어안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자 한태경이 금안으로 살짝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 모습에 재우는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 촌극은 사실 한태경이 모두 꾸민 것이다.